한국어의 차(茶), 일본어의 차(茶; ちゃ), 표준 중국어의 차(茶), 튀르키예어의 차이(çay), 힌디어의 차이(चाय), 포르투갈어의 샤(chá) 등 구개음화된 발음과, 한국어의 다(茶), 영어의 티(tea), 독일어의 테(Tee), 프랑스어의 테(thé), 스페인어의 테(té), 이탈리아어의 테(tè) 등 구개음화되지 않은 파열음 계열의 발음 모두 중국티베트조어 *s-la(茶)에 그 기원을 둔다. 서양 언어들의 t- 계열 발음은 민남어 떼(tê; 茶)에 그 어원이 있으며, 송원(宋元) 시대 취안저우(泉州)를 "동방제일의 항구"라고 부른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국어의 다(茶)는 차나무가 수입된 시기 중세 중국어의 발음인 /ɖˠa/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국[편집]
신라의 선덕여왕이 차 문화를 가져 왔고, 흥덕왕은 3년차에 진 다롄을 당에 보내어 씨를 받아 지리산 (상경사 일대)에 심었다. 지리산 남쪽).우리나라는 삼국시대에 고구려의 승려들을 통해서 전해진 것이거나 수로왕의 부인이었던 허씨가 아유타국(지금의 인도)에서 씨를 들고 온 것이라 여겨지는 두가지 설이 있다. 확실한 기록은 신라 흥덕왕때 당 문종에게서 선물로 받은 차나무 씨앗을 지리산에 심었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고분에서는 차가 출토되었으며 하동 지역에는 최고령 차나무가 존재하며 수령은 신라시대에 거의 닿는다. 오늘날에도 자주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라는 말이 널리 쓰일만큼 고려시대까지 차문화가 번성했으며 대부분 귀족과 승려층에서 소비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성종 때부터 다방이라는 관청이 있었으며 차와 관련된 왕가의 의식 및 약과 술 등을 다루었고 국가의 제사의식때 쓸 차를 관리했다.
고려시대부터 차에 상표나 부르는 이름이 생겼으며 차가 생산되는 지역에서는 다세제도가 생겨 일정한 수준의 차를 세금으로 걷고 등급을 붙었는데 눈이 내릴 때 들짐승을 피해 산에 올라가서 싹을 따서 여러차례 수작업을 거쳐서 진상해야하는 물건인 만큼 주민들이 차때문에 농사를 망치는 사태가 벌어져 이규보나 이제현 등의 당대 문신들로부터 상소가 빈번히 올라간 기록이 있다. 주민들은 산에 들어가 차나무를 없애서 차를 생산하지 않거나 차농사를 짓고 나머지 농사는 망치는일이 벌어졌다.이런 유래로 녹차는 작설차라는 이름으로 보다 잘 알려져 있으며 이제현이나 원천석 등의 싯구에서 차에 대해 표현하는 어구이다.
조선 세조의 숭유억불정책의 영향으로 차를 가장 많이 사용하고 보급하던 승려층이 권력계급에서 사라지게 되면서 차문화의 주도권은 양반가와 정부로 넘어가게 된다. 다방제도는 유지되었으며 차례를 관할하게 되었고 궁내에는 다시가 있어 모두 모여서 차를 마시는 시간이 있었으나 검약을 추구했던 유교 문화의 영향으로 사치품이었던 차는 일상적인 음다 문화의 중심에 나타나지 않게 되고 다과상에는 여러 가지 대용차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조선 후기인 약 16세기경에 들어 선비들과 승려들간에 문인으로서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차문화는 다시 시류의 중앙으로 돌아오게 된다. 다성으로 불리는 초의선사 의선의 동다송과 같은 역작도 나타나는 것도 이 시점으로 정약용과 김정희 등의 문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8]
지리산 일대를 따라 조성되었던 녹차 산지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이 일대의 지주였던 양반가가 몰락하고 당장 먹을 것이 귀해지면서 차나무를 방치하게 되는 한편, 일본인들이 보성과 광주 일대의 땅을 매입하여 녹차농장을 한국에 조성하려 했기 때문이다.해방 후 국가에서 해당 토지를 환수하여 일제 강점기 이전에 소유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돌려주게 됨에 따라 원래 지주의 손에 돌아가게 된다. 전란 후에는 주로 차를 만들던 사찰을 중심으로 해당 지역 농민들에게 차를 만드는 법을 가르치거나 차밭을 일구는 형태로 해당 지역 기간산업을 일으키는 일이 많아져서 이후 새로운 다원들의 토대가 된다.[9]
Comentarios